시와 그래픽의 만남



칠십 네 번째, 행간의 이미지 

“지형을 사진으로 찍어 처리한 단계에서, 숫자판은 텍스트 글줄의 서술적 흐름이 이제 고체처럼 결정화한 한 판의 그림이 된다. 시는 그래픽적인 이미지가 된다. 좌우가 반전됨으로 해서 인간의 음성으로부터 더 멀어지며, 서술적 텍스트로 읽히기를 거부한다(유지원)”

처음 두개의 이미지는 1934년 이상의 시 오감도가 조선중앙일보에 게재된 모습이다. 오감도는 시(詩)라기보다는 글자를 활용한 그래픽 포스터에 가깝다. 이상은 어떤 메시지도 전달하지 않겠다고 벼른 마냥, 글자를 뒤집고 단어를 무의미하게 반복한다. 물론 알려진 반대로 그의 글자 놀이는 시대의 어두운 초상을 나타낸 것이다. 당시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이상은 시대 전반에 깔린 무기력한 감각을 온전한 단어로는 표현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글자들의 분열적이고 무의미한 아우성으로 의미가 불가능한 시대의 어두운 이미지를 표현하고자 했다. 바로 이 점에서 이상을 순수하게 글자라는 타이포만을 가지고 메시지와 심상을 전달한 그래픽 디자이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현대의 많은 그래픽 디자이너들처럼 이상은 글자와 글자의 배치가 단순히 주제와 이야기를 실어나르는 도구가 아닌, 주제(시대의 무기력한 징후)를 보다 극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핵심 매질임을 오감도를 통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상이 반복과 도치의 글자 배열로 그 시대가 가진 의미의 불가능성을 표현했다면, 말레이시아 기반의 그래픽 디자이너 Angharad Hengyu Owen은 글자의 자유로운 배열로 세계가 간직한 넓고 풍성한 의미를 담아낸다. 그녀는 시인 Christian Marques가 유럽과 아시아를 8개월 동안 여행하며 쓴 원고를 바탕으로 글자들을 배치하였다. 그녀가 만든 작업물을 보면 각 글자는 하나의 별이 되고 그 별들이 만들어내는 별자리는 이 세계를 형성하고 있는 개별적인 소우주처럼 보인다. 즉 시인이 경험한 각 나라의 종교, 자연, 삶이라는 소우주를 글자라는 별을 통해 풍성하고 다양한 별자리로 그려낸 것이다. 당연하게도 어떤 페이지도 같은 레이아웃이 반복되지 않는다. 세계의 존재들은 저마다 다른 자신만의 소우주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글자가만드는세계의별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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