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시체들



팔십 세 번째, 행간의 이미지 

“모든 담론과 마찬가지로 디자인은 주어진 정보의 해석이며, 정보의 선택은 우선적으로 하나의 중재이며 사물들을 보고 느끼는 하나의 방식이다(리카르도 팔치넬리)”

이 판에 와서 느낀 것은 보기와 달리 생각의 질감이 농익지 못하다는 점이다. 개개인들의 노력들은 머리 숙여 존중을 마다하지 않지만, 개념과 사상을 다루는 솜씨는 대게 거칠고 얕아 보였다. 물론 나도 매분 매초를 다루는 일들을 처리해야 하는 까닭에, 대개는 임기응변을 무기로 사상적 세밀함보다는 일의 모양새를 그럴듯하게 만들어 왔을 따름이다. 그래서 그런지 에이전시라는 조직 속에서 내가 해왔던 것들 즉, 얽히고설키게 만든 그동안의 모양새들에 대하여 뒤늦게 자화자찬하거나 얕은 견문을 뽐내고 싶지 않았다. 더불어 그동안 내게 주어진 일들이 가진 생각의 깊이는 여전히 제자리 발걸음에 머물고 있다고 여겼다. 무엇보다 이것이 먹고사니즘을 위한 방편이라는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크게 의미 부여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기의 생존을 지탱한다는 목적 하에는 누구나 꼭같은 크기의 고귀한 책무를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6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나는, 여전히 내가 그토록 혐오하던 얕은 사상의 더미 위에서 허우적대는지 혹은 그럼에도 조금은 성숙한 사회적 인간으로서 전보다 나은 일들을 꾸려나가는 중인지는 알기 어렵다. 다만 나는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한 줌의 확신을 벗 삼아 지금을 가꾸어 나갈 뿐이다. 내가 나와 비슷한 길을 가려는 친구들에게 말하고 싶은 단 한 가지는 결국 이것 뿐이다. 즉 먼저 간 이들의 발자취는 존중하되 그것들이 당신이 가꾸어갈 내일 그 자체는 될 수 없다는 점. 오히려 그들의 발자취를 시체삼아 지금 당신이 품은 싱싱한 욕망을 끝까지 밀고 나가길 나는 희망할 따름이다.

#행간의이미지 #오늘의시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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