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뉘앙스


“아직 변치 않고 싱싱히 다가오는 죽음에 대해서 나는 감사하고 싶다. 그리고 그 싱싱한 죽음 때문에 더욱 싱싱해진 삶에 감사한다(황동규)”

말할 수 없는 것에 침묵하라는 청년 비트겐슈타인도 후일에는 말할 수 없는 것을 애써 말하는 노력도 하나의 언어놀이라 보았다. 언어놀이 안에서는 말해질 수 없는 것도 암묵적 규칙이나 침묵의 뉘앙스를 통해 서로 간 소통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진정한 사진이란 말해질 수 없는 이야기를 포착한다는 말로 시작하는 이 사진들은, 대단히 넓고 커다란 텅빈 스케일을 통해 풍경에 깊게 서린 이야기의 뉘앙스를 전하고 있다.

인간의 희노애락은 작은 미물의 사정으로 만들어 버리는, 땅과 하늘이 맞닿은 육중한 그릇이 품은 이야기. 황동규 시인이 풍장에서 맛본 것처럼, 숱한 죽음과 명징한 탄생 즉 죽음을 싱싱하게 기억함으로써 더욱 말근 생(生)의 지문이 남긴 이야기를 바라 본다. 더불어 영겁의 순환을 거듭하는 땅과 하늘 사이에 인간이 스스로를 탐했던 고투의 흔적, 두 발로 서고자 했던 생존의 이야기가 속삭인다.



단지 압도적인 물리적 크기 앞에서 겸허해진 것이 아니다. 저 풍경이 침묵함으로써 침전한 소리 없는 아우성이, 온 몸을 자극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의 울림과 땅의 떨림이 만들어낸 뉘앙스가 나를 온전히 감싸 앉는다.

이렇듯 미지의 뉘앙스를 포착한 사진, 이것이 전달하는 삶과 죽음이 맞닿은 간격 그리고 그 간격이 지닌 모호한 아름다움은 이 보잘 것 없는 육신의 생을 흥미진진 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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