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lected Images


이미지와 나의 관계


“흥미로운 것은 이런 '상향평준화된 이미지'를 소비하는 일은 다른 무엇보다도 실제로 중시되고, 경험되며, 누려진다는 점이다. (중략) 우리 삶이란 손을 뻗으면 닿는 그런 이미지의 연쇄 속에 자리 잡게 되었다(정지우)”

어렸을 때 남들보다 이미지에 대한 관심과 기억력이 조금은 달랐다. 한번 본 얼굴은 반드시 기억해 내고 좋은 이미지를 흥미롭게 바라보며, 어느샌가 새로운 이미지를 스스로 만들어내곤 했다. 다른 친구들이 게임으로 새벽을 달릴 때 나는 멋진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밤을 지새웠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대학교 때의 나는 외양의 세계가 아니라 정신의 내밀한 세계를 탐닉하고 여기에 전생을 바치고자 결심한, 독일 유학이 졸업 이후의 유일한 길이라 생각했던 철학도였다. 내 앞에 놓인 삶의 모든 외연은 동굴 속에서 바라보는 모습이라 못 박고, 이미지라는 우상 너머에 세계의 진리가 놓여 있다고 믿은 순진한 철학도였다. 그러나 대학원 진학하자마자 모종의 이유(?)로 철학을 그만두고 돌고 돌아, 지금은 자본의 존속에 기여하는 이미지 재생산에 힘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이제 와 지난날을 반추하면, 이미지는 내 삶의 모양을 가름해주는 기준점이었던 것 같다. 내가 앞으로 살아갈 모습을 그리면서, 어떠한 자세로 어느 공간에 있을지를 판단해주고, 관계에서 나는 어떠한 태도로 보일 것인가를, 그리고 내가 저지른 말과 행동들이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계속해서 곱씹는 일..등등. 나의 세계를 만들어 왔던 것은 결국 누군가에게 보여지는 모습, 즉 이미지였는지 몰라. 이렇게 삶의 모양새로 이미지를 바라보면, 이미지는 세계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것이 된다. 심지어 철학도 내가 어떠한 사유를 하고 있는지의 이미지를 결정하는 학문이 된다. 그러나 ‘보여지는 것’, ‘바라보는 것’에 대한 지나친 탐닉은 때때로 내면에 심한 갈증을 부른다. 이러한 갈증이 솟구치면, 예전 대학생 시절 중고서점에 산 닳고 닳은 오래된 철학책을 읽고 자신을 위안한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여전히 책 너머의 현실에는 이미지와 함께 살아가는 나 자신이 서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내가, 행간의 이미지를 쓰는 것은 내 삶에 마주하는 이미지의 진짜 모습을 발견하고자 시작했다. 그런데 ’이미지의 행간’이 아니라, ‘행간의 이미지’라는 일본식 표현을 선택한 것은 모호한 느낌을 자아내기 위함은 아니었다. 관찰의 대상은 이미지 자체가 아니라 이미지와 내가 관계 맺는 '행간의 모양새'라서 이름을 이렇게 지은 것. 그리고 이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드러내면 어딘가 내가 반드시 발견하고 만들어야 할 이미지의 본연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일상의 구석구석이 이미지로 넘쳐나고 이미지가 초현실이 되어가는 시대. 이미지 노동자로서 스스로가 우상에 젖어 들지 않기 위해, 나는 내 자신과 이미지가 맺는 행간의 이야기를 부단히 쌓아 올려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곤 습관처럼 이내 좀 더 나은 이미지를 만들고 싶은 욕망이 솟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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