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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의 고민에 대한 답변



0.
몇 달 전 회사 동료이자 후배에게 <기획은 패턴이다>라는 책을 읽고 자신만의 패턴을 찾아오는 과제를 내준 적이 있다. 자칫 부담이 될 수 있는 과제를 후배는 자신만의 디자인 패턴과 일에 대한 고민을 정성껏 장표로 준비해 전달해주었다. 아래의 글은 그 고민에 대한 일련의 두서 없는 답변을 정리한 것입니다.

1.
브랜드 포지셔닝에 관한 다종다양한 담론이 있지만 한마디로 말하면, 결국 과거로부터 현재를 바라보고 이로부터 브랜드의 미래를 상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형적 예측과 추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장 좌표에 우리가 선점할 수 있는 유행의 빈틈을 정확히 타깃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 소위 촘촘한 4P 전략을 실행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하나의 소비자 연령대 안에서도 서로 충돌되는 욕망의 대립이 만연하고, 새로운 유행이 발로할 수 있는 매체를 A와 B급의 경계로 나누기 어려울 정도로 다변화되는 상황에서 브랜드 포지셔닝을 위한 ‘공식화된 좌표’를 만들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그만큼 욕망이 질적으로 개인화되고 양적으로 다양한 기회를 부여받아 그 갈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2.
이처럼 브랜드의 존재 사명인 개인의 ‘욕망’을 점유하는 문제는 정말 복잡해졌어요. 동시에 정말 단순해졌어요. 그리고 욕망의 회전이 시장의 예측을 훌쩍 뛰어넘어 있죠. 후배님의 생각대로 타깃의 욕망을 어설프게 어림잡는 전략은 결국 결과물만 매끄럽게 제시하는 브랜딩으로 끝나게 될 확률이 높죠. 타깃의 욕망 정의가 어려우니 이미지 좌표를 그리기 힘들고 이에 따라 고객사에 제시해야 하는 브랜드의 모습에 대하여 우리 스스로가 불확신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포지셔닝이란 것이 가당키나 한 것일까요? 그저 브랜드의 가치를 알아보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까요? 아니면 반대로 에이전시 입장에서 사람들이 절로 공감할 수 있는 진정성을 가진 브랜드가 찾아와주길 바라야 되는 것일까요?

3.
욕망의 패턴에 대하여 좀 더 이야기해 볼게요. 정말로 빨라졌어요. 욕망을 소비하고 순환하는 패턴이 대단히 빨라졌어요. 욕망의 여운을 가질 수 있는 시간이 짧아졌어요. 가장 일회적인 해프닝들 중심으로 우리의 일상이 빠르게 회전하고 있어요. 이슈가 나타나고 소비되고 또 새로운 이슈가 정신없이 몰아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언가를 단단히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현재적인 해프닝에 내가 합류하고 있다는 상태와 이것을 가장 빠르게 인증하는 일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욕망이 파편화되고 일회적으로 변화하는 만큼 거짓과 위선, 인위적인 것에 대한 의심 또한 강해졌어요. 사람들은 더욱 ‘진짜인 것’에 대한 증명과 표현을 열망합니다. 우리 업계 사람들이 한결같이 외치는 ‘진정성’의 기준을 브랜드에 요구하는 것이지요. 예전에는 유명한 누군가가 사용한다고 광고하면 되었는데, 이제는 이런 우상의 방식으로는 고객이 쉽게 믿을 리 없죠.

4.
이처럼 사람들의 욕망이 표면의 시간 위에 빠른 순환을 거듭하면 할수록 진정성에 대한 갈망은 깊어집니다. 그래서 정신적인 것, 보다 철학적인 신념을 이야기하는 브랜드에 사람들이 더 열광하는 것 같아요. 물론 그 브랜드의 실체가 겉으로 내세우는 매니페스토에 부합되도록, 꾸준한 노력과 이를 증명해내는 최소한의 시간들을 경유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증명과 메시지가 자칫 무겁거나 어려워지면 고객들에게 외면당하기 쉬워요. 진정성에 대한 갈구의 충족 또한 일회적인 욕망의 추구라는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브랜드에 자신의 시간을 충분히 내어주는 순진한 고객들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요. 이 지점에서 우리 같은 에이전시의 일에 어떤 딜레마가 발생하는 것 같기도 해요. 첫 번째로 우리가 만나는 대부분의 고객사는 진정성의 걸음마를 막 뗀 존재들이라는 점. 두 번째로 3~6개월의 단발적인 프로젝트에서 진정성을 길러낸다는게 어쩌면 어불성설이라는 점. 마지막으로 어찌어찌 겨우 만들어낸 브랜드의 진정성과 가치를 고객에게 수 초도 안 되는 시간 안에 설득해야 한다는 점 등등. 어쩌면 모베러웍스가 주목받는 이유는 이러한 과정 자체를 투명하게 보여줌으로써 고객의 신뢰를 얻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겠네요.

5.
물론 직장인 디자이너에게 이런 전체적인 흐름과 노력이 들어가는 이슈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행동을 취하기 어려운 점이 있죠. 그리고 고객사가 우리에게 바라는 일의 수준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변하지 않았죠. 좀 더 나은 포장을,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덜어주고 고객들이 열광할 수 있는 매력적인 선택지를 제안해주는 것. 그렇다고 이대로 톱니바퀴 돌 듯이 주어진 일을 닥치는 대로 처리해가는 직장인으로 머물 것이냐 하면 또 직업인 디자이너로서 우리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죠. 이런 이슈들에 대하여 당장 일거에 해소하기 어렵다고 봐요.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진지한 고민의 결을 계속 유지해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크고 작게 주어지는 일 가운데 좀 더 다르게 생각하고 새로운 시도의 작업을 진행하는 것. 이런 노력들을 계속하다 보면 언젠간 새로운 변화의 결 속에 이미 합류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요.

6.
역시나 제 성격답게 횡설수설에다가 기승전잔소리와 같은 이야기로 마무리가 되었지만, 저로서는 이것 외로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는 내용이 없네요. 여하간 책 읽기 과제를 열심히 수행해주어 고마워요. 어느 자리에 있든 힘내 봅시다. 디자인은 언제나 그렇듯 세상에 존재하는 멋진 일 가운데 하나기 때문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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